이슬람 이데올로기와 국제운동 ----서동찬 (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by soulkorea posted Dec 0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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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이데올로기는 진실의 세계를 보지 못하게 하는 ‘허위의식’으로 규정될 수 있지만, 개인이 현실을 이해하는 의미의 체계로서, 적극적으로 인생의 목적과 비전을 설정케 하고, 나아가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구성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여 한 영혼이 이데올로기에 감염이 되면,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하게 된다. 아니면 이전의 이데올로기가 흔들리고 새로운 의미체계가 인간과 사회를 지배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객관적 실체와 관념의 형태인 이데올로기를 별개의 두 세계로 보고 어느 것이 더 중요한(일차적인)지 논쟁했던, 전통적인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오랜 갈등도 이제는 의미를 잃고 있다. 분명한 것은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이 생산되고 유통되고 경쟁하고 조우(encounter)하고 충돌(clash)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조금은 이분법적이지만 서구와 비서구라는 문화적이고 문명적인 양극이 엄연히 존재한다. 서구 문명이라고 하면 민족국가, 자본주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등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면, 비서구 문명은 이와 달리 초민족주의(보편주의), 공동체주의, 영성주의 등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에 접어들면서, 서구와 비서구의 구분이 더 이상 효력을 갖지 못하고, 다만 지배적 문명의 확장과 이에 반응하는 대응과 대안의 이데올로기가 영토 구분을 초월하여 전 지구적으로 조우하고 충돌하면서 상호간에 변용과 변이의 과정을 거듭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런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를 기점으로 필자는 본고에서 글로벌 시대의 이슬람 이데올로기의 변이과정과 국가와 영토와 문화를 초월하여 전 지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이슬람 국제운동의 변모와 특징을 분석하고, 그 미래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연구의 목적을 위해서 정치권력 장악을 통한 이슬람국가 형성을 목표로 하는 20세기 이슬람부흥운동의 사상적 뿌리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하며, 정치적 이슬람의 확장과 좌절 과정을 연구하면서 국가보다는 개인과 사회에 중점을 두는 신원리주의적 이슬람운동의 성장과정과 운동성 연구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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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시간부터 "이슬람 이데올로기와 국제운동" 이란 제목으로

아래의 목차의 내용들이 연재 됩니다. 관심가져주시고, 이슬람에 대해 더 많이 알게되는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20세기 이슬람 부흥 운동

1. 이슬람 부흥 운동의 이데올로기


1) 무슬림형제단

2) 싸이드 쿠틉 Sayyid Qutb(1906-1966)

3) 알 마우두디 Mawlana Mawdudi(1903-1979)


2. 정치적 이슬람의 부상


3. 알카에다 글로벌 네트워크


II. 포스트이슬람주의 글로벌 네트워크

1. 정치적 이슬람의 파라독스

2. 포스트이슬람주의

결론--



I. 20세기 이슬람 부흥 운동

1. 이슬람 부흥 운동의 이데올로기

15세기부터 형성되어 온 세계자본주의 체제는 세계를 하나의 활동 공간으로 통합하였고, 비서구권 문명들은 여기에 다양한 양태로 반응 할 수밖에 없었다. 반응의 형태를 개념적으로 유형화 시켜보면, 크게 개혁주의 유형, 폭력 저항 유형, 원리주의 유형 등의 양태를 보이는데, 대부분 이슬람세계는 개혁주의 유형에 따라 민족자결과 국가주권에 근거를 둔 민족국가형태의 정치적 단위로 재편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 통합되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에 근거하여 이슬람은 종교 층위에 머물고 정치와 경제와 다른 사회 영역은 개혁과 실용에 바탕을 둔 실험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917년에 발생했던 사회주의 혁명은 이슬람 세계에도 영향을 미쳐 민족국가 단위 안에서도 좌파, 우파, 혹은 중립적 노선을 선택하게 했고, 전 이슬람 세계는 미소 냉전의 국제적 파워 게임 속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현존했던 사회주의 실험이 소련에서 실패하고 중국에서 변형되고 서구 사회에서 다양한 좌파적 형태로 변이 되었듯이, 세계자본주의체제 하에서의 이슬람 사회 또한 발전 유형과 정체성에 대해 끝나지 않는 논쟁과 충돌과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다. 20세기의 이슬람 부흥 운동은 이슬람국가의 세속화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그 이전 시대의 원리주의 운동과 별반 다를 게 없다.

1) 무슬림형제단

    1928년에 창설된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은 20세기 이슬람부흥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이 설정한 기본 이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슬람은 포괄적인 가르침이다. 즉, 종교이자 국가이고, 삶의 궁극적 목적이자 길이며 방법이다. 둘째, 이슬람 공동체는 초기 이슬람을 회복해야 한다. 셋째, 범이슬람주의의 깃발이 있는 모든 지역은 이슬람의 고향이며 국가이다. 따라서 이것에 방어는 무슬림의 방어다. 넷째, 이슬람 칼리프체제는 복원되어야 한다. 다섯째, 이슬람 정부의 수립은 무슬림형제단의 의무다. 여기서 우리는 20세기 이슬람부흥운동의 특징이 전 세대와는 달리 이슬람 정부의 수립을 전략적 목적으로 설정하여, 정치적 조직과 당의 건설을 추구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2차 세계대전 말, 무슬림형제단의 조직원수는 100만 명에 달하고, 지부 조직은 5,000개에 이르는 거대한 사회정당으로 성장한다.


2) 싸이드 쿠틉 Sayyid Qutb(1906-1966)

    무슬림형제단 소속이면서 이슬람혁명이론의 주창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싸이드 쿠틉의 사상에는 세속주의, 물질주의, 자본주의를 이슬람 사회를 파괴시킨 주범으로 보는 시각에서 몇 가지 이슬람정치운동의 개념 틀들이 구체화 되어 있는데, 1964년에 발간된 쿠틉의 저서 <길가의 이정표>에는 아래와 같은 10가지 이슬람 혁명 이념이 명시되어 있다.


① 현대이슬람을 통치하는 기본적인 사상은 자힐리야 시대의 것이다. 2가지 개념은 상반되며 절충은 있을 수 없으며 한 가지를 제거하는 것에 있다.

② 진정한 무슬림의 의무는 이슬람으로의 교화와 전향을 위한 선교와 지하드를 통해 자힐리야 사회를 일소하고 이슬람사회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③ 무슬림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지상에서 모든 악과 고통과 탄압을 제거하고 알라의 주권이 지배하는 알 하키미야(신의 통치)를 구체화 시키는데 있다.

④ 오직 이슬람이 진리의 종교이다. 다른 모든 종교들 철학, 이론들은 무익하고 오도된 것이다.

⑤ 믿음이란 매일 말과 행위로 실현되는 것이기에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

⑥ 변화는 행동과 원리주의 혁명에서 발생한다.

⑦ 혁명은 현 사회의 외부로 등장하는 미지의 한 사람의 신앙을 통해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무슬림은 새로운 이슬람사회가 통치 권력을 잡을 때까지 그를 도울 것이다.

⑧ 이러한 변화는 다름 사람의 속박으로부터 개인이 해방되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변화는 이슬람을 진실로 믿는 집단으로 가능할 것이다.

⑨ 지하드는 서구학자들이 해석하는 것과 다른 것이고, 지하드는 오직 이슬람만이 전파되도록 전 세계를 지속적으로 해방하는 것이다.

⑩ 유대교와 기독교는 불신자이다.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와 유대인의해석은 순수학문분야를 제외하고 배제되어야 한다.


위에 나타나는 것처럼 싸이드 쿠틉은 오늘날 전 세계 사람들은 자힐리야, 즉 이슬람이 탄생하기 전의 우상숭배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지구상에서 악을 몰아내고 알라의 주권이 다스리는 신의 통치(하키미야)를 실현하는 신정정치론을 설파하면서도 이 사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전위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3) 알 마우두디 Mawlana Mawdudi(1903-1979)

   인도 힌두교 배경에서 이슬람이 소수집단으로 전락하고 소수종교로서 이슬람을 지켜가야 했던 환경에서 등장한 강력한 이슬람운동의 주창자로서 기억되고 있는 알 마우두디도 또한 이슬람 국가를 모든 무슬림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열쇠로 보았으며, 위로부터의 이슬람화 전략을 선호했다. 결국 그는 레닌의 혁명 모델을 모방하여 이슬람혁명 전위대로서 1941년에 Jammat-e-Islami를 창설한다. 그러나 알 마우두디는 쿠틉과는 달리 권력을 잡는 것 보다 이슬람국가 이론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고, 생활의 전 영역에 대한 이슬람적 해석을 체계화시키는 이슬람신학을 발전시키고, 폭력보다는 교육과 엘리트 육성을 통한 이슬람 부흥을 설파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이슬람주의의 1차 공격대상은 1970년 전에 모든 이슬람국가들에서 지배적 이데올로기 민족주의(국가) 모델임을 알 수 있다. 우선 그들의 역사관은 자힐리야와 이슬람 시대로 극명하게 구분되는데 유일신을 믿지 않는 사회인 자힐리야가 인간이 입법자인 사회에 까지 적용되어 이슬람통치가 이루어지기 위해 자힐리야 사회는 타도되어야 하는 지하드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민족국가 모델이 이슬람 세계에 들어오면서 이슬람의 땅 (dar el-Islam)이 파편화 되고 민족문제와 종족 갈등이 그치지 않게 되었고, 초기의 개혁주의자들이 민족주의의 세속적 이상을 추구하면서 종교적 기반을 도외시 했다고 비판한다.


2. 정치적 이슬람의 부상

1970년대는 이슬람주의 이상을 정치적인 행동으로 실천하는 대중운동이 급부상하게 된다. 그 이전까지는 이성주의적 관점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을 중세 광신도로 보는 시각이 강했다. 더욱이 이슬람 세계에서 좌파 민족주의 정권이 제어하고 사회주의 급진 사상이 퍼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보수주의적 성향의 이슬람 사상이 사회에 전파되는 것을 허용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슬람부흥운동이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변수로 인정이 되고 전투적인 이슬람이 부상하게 된 데는 몇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이 작용을 했다.

첫째, 좌파 아랍민족주의의 위기를 들 수 있다. 아랍 민족국가들은 이슬람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좌파(이집트 낫세르, 바트당 시리야, 이라크)와 우파(요르단왕정, 아라비아 반도)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런데 67년 6일 전쟁의 패배(낫세르)는 좌파 민족주의의 실패로 받아 들여졌고, 사우디는 이것을 종교를 망각한 것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규정하는 등,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공황과 공백이 발생했다. 이것을 계기로 좌파운동에 투신했던 아랍계 학생들이 이슬람주의에 대거 가담하게 되었고, 쿠틉류의 이슬람 이데올로기가 좌파이론을 대체하기에 이른다.


둘째, 1973년의 중동의 OPEC결성에 기인한 오일 위기를 들 수 있다. 중동 산유국들은 73년 중동전쟁이 일어났을 석유자원을 무기로 사용하여 서방 세계를 압박하게 된다. 이것을 통해 중동 이슬람 세계는 오일 embargo를 통해서 국제무대에서 압력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더욱이 석유 부자국가 된 사우디아라비아는 모든 무슬림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전통적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와하비즘을 전지국적으로 전파하는 활동을 개시한다. 다시 말해서 73년 이 후, 석유 부자가 된 와하비주의자들은 순니 세계의 폭 넓은 개종 proselytizing 캠페인 능력을 구비하게 된 것이다. 와하비스트들의 목적은 다양한 민족주의운동을 대체하고 메카의 통치 권위 하에 다양한 목소리들 정화시키는 것이었다. 아울러 전통적인 이슬람 지경을 넘어선 서양에서의 포교 열정(서양의 무슬림 이민 인구들을 대상으로)과, 자선과 선행의 거대한 제국 관리자로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미지는 사우디 왕정이 내포한 취약한 정치적 기반(친미정권)을 가려주는 효과가 있었다. 개종 네트워크, 보조금, 이민노동자의 유입을 통해 초국적 사우디 체제는 대다수 무슬림 국가에서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서 환심을 샀다. 75년 무렵엔,수단,파키스탄,이디아,남아시아,이집트,팔레스타인,레바논,시리아에서 대학졸업학위를 가진 청년들과 숙련된 전문가집단, 예술가 등등이 걸프국가들로 이민 오기 시작하여 점차 와하비주의자들로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소진되지 않는 엄청난 펀드가 Dawa(call to Islam)의 증대를 위해 마련되었고 Muslim World League(1962)는 무슬림이 사는 세계 각국에 사무실을 개원하고 이슬람 협의체, 사원들, 미래를 위한 투자 계획 등을 지원함으로 개척의 역할을 하였다. 사우디 종교부(장관급)는 사원 주변으로 무료로 수백만 권의 코란을 인쇄하여 세계적으로 배포하기 시작했고 1,500개 이상의 사원을 사우디 펀드로 건립했다.


셋째, 인구 구성의 변동도 큰 변수로 작용했다. 1970년대가 되면 식민지 해방 투쟁의 구세대가 사라지고 해방 후에 출생한 세대가 사회의 주류로 등장했다. 구세대에 비해서 해방 후 세대는 저항적 민족주의 약했고, 독립 직후 풍부했던 경제적 이익을 상대적으로 많이 향유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70년대 인구 폭발의 시대였다. 세계 인구 자료(뉴욕,1994)에 따르면, 알제리 41.2%,방글라데시 46.6%,이집트 42.9%,인도네시아 39%,이란 49.4%,사우디아라비아 58.3%,터키 48.3% 등의 인구성장률을 기록했고 24세 이하가 전 인구의60% 이상을 차지했다. 특별히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동시에 도시에 유입되는 청년 인구가 팽창하고, 의무교육 등을 통해 교육수준(literacy)이 전반적으로 급격히 성장한 시대였다. 그러나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주기적인 경기변동(특히 85년의 유가하락 사태)을 겪으면서 도시 청년층의 좌절과 빈곤이 심화되고 이들이 바로 서구적 모델에 대한 거부 세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넷째, 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의 영향이다. 혁명 전의 이란은 오일 수출이 급증하고, 에너지원 안전 확보 차원에서 소련의 인도양 진출 억제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했다. 결국 이것이 호메이니의 비판을 받는 구실이 되었다. 이란은 근대화를 통한 중산층이 증대되고 있었음에도 혁명 전 시기는 사회의 전반적인 민주화가 진행되지 않고, 비민주주의적인 통치와 억압이 중심이 된 경찰국가의 성격을 띠었다. 근대화 과정은 전통적인 시장을 근거로 한 경건한 무슬림 중산계급이 새로운 상권에 밀리면서 이란 사회 집단의 불만 계층으로 확대되어 갔고, 이에 더하여 농촌 출신 도시유입 청년층의 빈곤은 거대한 사회변혁의 잠재력으로 작용했다. 더욱이 당시 팔레비왕가는 전통적인 시야 성직자 계층과도 불화했고, 시야파 이슬람의 메시아 사상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혁명적 이상을 촉발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적 성직자와 젊은 이슬람주의 지식인 등 다양한 세력들을 융합하는 능력을 지닌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세속정권을 전복하고 정치적 혁명을 통해 샤리아에 기반을 둔 이슬람국가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다섯째, 아프가니스탄 반소 지하드(Anti-soviet jihad)이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하자 70년대에 성장한 전 이슬람 세계의 지하드 전사들이 대거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배치된다. 그러나 반소 지하드는 무슬림 국가들에 의해 주도되지 않고 처음부터 초국적 이슬람 종교네트워크가 개입했다. 그래서 1980년대 중반까지는 금융적 지원 형태로 국제적 이슬람 연대가 이루어졌고, 85년 이후, 국제 지하디스트들(주로 아랍인들)이 페샤와르(파키스탄)로 집결해서 훈련을 받고 아프간으로 유입되었다. 즉, 초기에는 아랍 원조의 안정적 배달을 위한 아랍요원들이 투입 되었고(사우디 Red Crescent 등 이슬람구호요원 등장), 80년대 중반부터는 아랍전사들로 배치되었다. 이 때 페샤와르에 들어왔던 인물 중에서 주목할 만한 사람은 Abdallah Azzam으로서, 그는 팔레스타인대학 교수였지만, 1973년에 사우디의 Jeddah로 이동하여 Abd al-Aziz 대학에서 교수를 하면서 당시 학생이었던 오사마 빈라덴을 만나 아프간 지하드로 참여할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1985년 페샤와르에 등장하여 Council of Islamic Coordination을 세우고, 반소 지하드 학교를 운영한다. 아잠은 지하드가 집단적 의무가 아닌 개인적 의무(Fard kifaya)이며, 윤리와 재정으로 아프간 지하드에 참여하지 않으면 죄라고 규정하였고, 지하드는 상실한 전 세계 무슬림 영토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당시 1만 8천에서 2만5천의 아랍들이 아잠을 통해서 이슬람 전사로 동원이 되었다고 추정한다. 물론 페샤와르에는 300만 명 규모의 아프간 난민들이 75년부터 집결해 있었고, 파키스탄의 데오반디 마드라사 네트워크를 통해서 탈민족화된 탈리반들이 교육 받고 있었다. 한편 미국, 걸프 국가들의 원조(1982년,12 억불/해)는 한편으로 파키스탄의 경제를 안정시켰고, 원조금과 무기의 횡령과 밀반출로 Karachi항구는 가장 폭력적 지역이면서 헤로인의 서방 수출 기지로 활성화되었다. 결국 92년 아프간 무자헤딘이 카불을 점령함으로써 반소 지하드는 성공을 했고, 여기에 참전했던 전 세계 지하드 전사들과 이슬람네트워크는 소련이 아닌 새로운 이슬람 변방에서의 전 지구적인 지하드를 준비하기에 이른다. 당장 오사마 빈라덴과 자와히리가 중심이 된 알카에다 조직은 수단, 런던 등지에 센터를 두고 글로벌 지하드를 지휘했고, 96년에 다시 아프간의 탈리반 정권 수립 후 칸다하르에 기지를 옮기면서 2001년 9/11 공격을 기획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제반 요소들이 결합되면서 70-90년대는 팔레스타인, 이집트, 수단, 알제리, 말레이시아, 체첸, 중앙아시아, 보스니아, 코스보 등 서구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변방 지역에서 수많은 충돌이 발생하고 정치적 이슬람이 왕성하게 활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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