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선교세미나 - 정형남선교사

by soulkorea posted Jul 07,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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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권에서 기독교 선교


정형남 선교사1
(actsmet@yahoo.co.kr/ 중동선교회 www.met.or.kr)


1. 이슬람의 6 信


1) 알라(Allah)
* 모든 무슬림들은 “알라후(Allahu) 아크바르(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를
적어도 하루에 32회 암송한다.
* 이슬람에서 알라의 초월성이 크게 강조되나, 그의 내재성은 강조되지 않는다.
(연못에 빠진 자에 대한 3인의 비유)
* 알라를 하나님으로 번역하는 문제/ 선교사 게일과 김용욱의 이야기


2) 알라의 천사들


3) 알라의 책들 104권 중, 100권 분실되고 4권만 현존한다.
* ①모세 오경(토라) ②다윗의 시편(자부르) ③예수의 복음서(인질) ④무함마드의 코란


4) 알라의 선지자들(사도들)
* 6대 선지자: ①아담 ②노아 ③아브라함 ④모세 ⑤예수 ⑥무함마드
* 코란에 언급된 25명의 중요 선지자: 아담, 이드리스(에녹?),노아,후드,살레,
아브라함,롯,이스마엘,이삭,야곱,요셉, 욥, 줄기풀,슈아이브,요나,모세, 아론, 엘리야,
엘리샤,다윗, 솔로몬,카카리야,요한,예수,무함마드
* 이슬람권 선교의 가장 좋은 접촉점 중의 하나는 알라의 선지자들이다.
그러나 무함마드를 접촉점으로 삼으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 “코란의 아담과 성경의 아담”
* “코란의 부활과 성경의 부활”
* .“이슬람의 최대 축제와 아브라함의 아들 제사”

5) 알라의 심판날
* "전도폭발" 첫째 질문과 "이슬람 신앙" 5번째 항목을 중심으로 한 글
“이슬람권 전도 수월한 면도 있다”.
* “코란의 부활과 성경의 부활”
6) 알라의 운명지어줌(Qadar)
* 정형남의 글 “코란의 아담과 성경의 아담” 중
코란의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통해서 알 수 있음


* 위 1)-5)까지는 코란 4:136에 근거한다. “믿는 자들이여, 알라와 그의 선지자에게 계신된 성서와 너희 이전에 계시된 성서를 믿어라 했거늘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과 최후의 날을 부정하는 자 있다면 그는 크게 방황하리라”(코란4:136)
그리고 6)은 코란 전체 속에 흐르는 내용을 근거로 한다.


2. 이슬람의 5 行:
1) Shahada (샤하다-신앙 증언, 고백)
* “나는 알라 이외에는 다른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임을 증언한다.”
(아슈하두 안날 라 일랄 라후 와무함마두 라수울라히)

2) Salat(쌀라-기도, 예배) 하루에 5번씩 메카(Mecca)를 향하여 기도한다(끼블라)
* 이슬람권에서 운영하는 비행기의 특징
* 기도의 방향(끼블라), 예루살렘에서 메카로 바뀌게 됨


3) Zakat(자카트-구제)


4) Saum(싸움-금식)
*이슬람력 9월 라마단 한달 동안 내내 금식하고, 10월 1일이 되면, 금식을 멈추고
축제를 한다. 그 축제 이름은 아랍어로 에이들 피트르(Eidl Fitr), 영어로 The Feast of Breaking Fast라고 한다.


5) Hajj(하지-성지순례)
*하기 기간은 이슬람력 12월 8일-10일이다. 마지막 10일이 축제의 날이다.
그 축제는 아랍어로 에이들 아드하(Eidl Adha, 희생제)이고,
영어로 The Fest of Immolation(Sacrifice)"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슬람의 최대 축제와 아브라함의 아들 제사”를 참고하라.
* 이슬람의 두개의 축제:
① 에이들 피트르(Eidl Fitr)를 소(少)축제라고 하고,
② 에이들 아드하(Eidl Adha, 희생제)를 대(大)축제라하고 한다.


3.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
A.D 570: 무함마드 출생
610: 자칭 계시를 받았다고 함
622: 메카에서 메디나로 도주(헤지라 A.H.1) A.H.= Anno Hegira
메디나에서 최초의 이슬람 공동체(움마)가 형성되었다.
630: 메카탈환(여러 전투를 행한 후,
만 명 가량을 피를 흘리지 않고 메디나에 입성함)
632: 사망(메카 탈환 2년 만에 사망, 자연사)

4. 무함마드와 그의 후계자(칼리파)들
*무함마드 사망 당시 아라비아 전지역을 점령했으며,
점령된 족속들은 그에게 세금을 납부하였다.
* 2,3,4대는 모두 동료 무슬림들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1대 아부바크르( 2년): 무함마드 사후 세금 납부를 거부하는 족속들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변방지역들을 공격하게 되었는데, 이는 아라비아 지역 밖으로
이슬람이 팽창되는데 계기가 되었다.

*2대 칼리파 오마르(10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라크, 이집트, 리비아까지 점령함
* 예루살렘의 황금의 돔 사원을 오마르 사원이라고도 함
*3대 칼리파 오쓰만(12년): 그의 생질 무아위야(시리아 총독)가 4대 칼리파 알리와의 싸움을 통하여 움마이야 왕조를 탄생시켰다.
더불어 순니파(현재 이슬람의 83%)가 생겨나게 되었다.
*4대 칼리파 알리(5년):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며 무함마드의 딸인 파티마와 결혼하였다. 알리에겐 두 아들, 하싼과 후세인이 있었다. 하싼은 무아위야와 잘 지냈다. 그리고 순니파를 싫어하거나 대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세인은 무아위야와 대립한다. 그래서 후세인이 이라크에서 무아위야 군대와의 전투 중, 사망하게 된다. 그리하여 후세인을 기념하며 그를 따르던 자들 중 시아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무함마드의 혈통성을 강조하고 1-3대 칼리파를 인정하지 않으며 알리만이 전통적인 혈통적 칼리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아파는 이란을 중심으로 살고 후세인 순교일을 중요시 여겨 명절로 지키고 후세인 이 순교당한 장소인 카르발라를 순례하려 한다. 금년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카르발라가 사담 후세인이 제거 된후 더욱 주목을 받게 된다. 사담 후세인은 순니파로서 시아파의 카르발라 순례를 통제하여 왔다.


5. 이슬람화와 아랍화


6. 9.11. 테러, 이라크 전쟁과 이슬람권 선교
중동선교 소식지 5,6월의 “부시의 이스라엘 중심적 리모델링 꿈과 우리의 새 예루살렘 중심적 하나님 나라 건설 꿈”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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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란의 아담과 성경의 아담 I


성경의 아담과 코란의 아담은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가? 언뜻 보면, 그 둘은 같기도 하고, 엇비슷하기도 하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완전히 다르다. 그 점을 바르게 파악하는 것도 이슬람권 영혼들을 위한 기독교 선교의 밑거름이 된다.


1. 같은 점들
코란의 아담도 성경의 아담처럼(창2:7), 흙으로 만들어졌다(코란3:59). 그리고 성경의 아담처럼(창3:6), 어떤 특정한 나무의 과실을 따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지만(코란7:19), 그 과실을 따 먹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의 수치가 드러나게 되었고(코란7:22; 20:121), 그들이 살고 있던 동산을 떠나게 되었다(코란7:23). 코란은 창조 역사가 성경처럼(창1:1~2:3), 엿새 동안에 걸쳐 이루어졌음을 소개한다(코란7:54; 32:4; 57:4).


2. 엇비슷한 점들
1) 동산을 다스리는 일과 지상의 대리인
코란의 아담도 성경의 아담이 동산을 다스리는 자로 세움을 받고(창1:26-28), 동물의 이름을 지어준 것처럼(창2:19-20), 지상에 대리인으로 세움을 받고,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었다(코란2:30-33).
그러나 코란은 성경과 달리, 알라(Allah)가 미리 각 동물의 이름을 천사들에게는 알려주지 않고 아담에게만 알려 준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름을 맞추어 보도록 하고 아담은 천사들 앞에서 그 이름들을 명하게 된다. 그리하여, 알라는 아담의 천사에 대한 우월성을 드러내는 가운데 천사들로 하여금 아담에게 엎드려 경배하도록 한다. 그러자 천사들은 알라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담에게 경배한다. 그러나‘이블리쓰’만은 그의 교만으로 그 명령에 거절한다(코란2:31-34).
왜 ‘이블리쓰’가 아담에게 불순종하였는지 알라로부터 추궁을 받게 되자 아담은 흙으로 창조되었지만, 자신은 불로 창조되었으니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낙원으로부터 알라의 추방선언을 듣게 된다. ‘이블리쓰’는 그의 심판을 마지막 때로 유예하여 줄 것을 간구하여 유예를 얻게 되지만, 낙원으로부터 이 땅으로 추방을 당한다. 그리고 그는 이 땅에서 인류의 유혹자로 살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알라는 그와 그를 따르는 이들로 지옥을 채우리라고 답한다(코란38:73-38, 7:12~18; 17:61~65).


2)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이 나무”
성경의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창2:17상)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코란의 아담은 “이 나무에 접근하지 말라”(코란2:35; 7:19)는 명령을 받았다. 코란은“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 나무”라는 표현으로 바꾸었다. 에덴동산에는 선만 있지 악이 결코 있을 수가 없다는 코란의 논리가 동원된 것이다.
그러나 그 논리는 잘 못된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할 때, 그 나무속에 악이 존재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담이 그 선악과를 따 먹게 되면, 그 열매 속에 있는 악이 아담 속으로 들어가 아담이 악하게 된다는 말씀도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 악이 있을 수 없기에, 선악과가 있을 수 없다는 이슬람의 논리는 성경의 문맥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가운데 펼쳐진 것이다.


3. 다른 점들
1) 코란의 아담은 “정녕 죽으리라” 라는 경고를 받지 않음
코란의 아담은 “(그 나무의 실과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하)라는 말씀을 받은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의 아내가 뱀에게“...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3:3)고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뱀이 여자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4) 라고 유혹할 필요도 없다. 한마디로, 코란에서는 유혹자와 유혹받는 자 사이에 이른바 ‘죽음의 논쟁’이 전혀 없다. 성경의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경고를 받았지만, 코란의 아담은 그 실과를 따 먹게 되면, “너희가 죄인들 가운데 있게 되리라.”(코란7:19하)라는 경고를 받았을 뿐이다.
성경은 아담 내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난후,“정녕 죽으리라”라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대로, 그들은“죽은 자들”이 되었다. 성경은 첫 사람 아담이 죽었고, 그 후손들이 아담 안에서 모두 다 죽은 자들이라고 선포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성경의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게 되었을 때, 그가 그의 육신적 생명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죽은 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아담 안에서‘죽은 자들’이 되었다.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에게서 태어나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죽은 자들’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코란의 아담은 성경의 아담에게 찾아 볼 수 있는 그 특별한 의미의 “죽음”을 모른다. 코란의 아담은 그의 육신의 수명이 다 되어 죽었을 때 드디어‘죽은 자’가 되었을 뿐이다.
2) 코란의 아담은 그 후손들에게 죄를 대물림하지 않음
성경의 아담 내외는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분부를 받고 난 다음, 얼마 동안의 기간이 지난 후, 그 과실을 따 먹게 되었을까? 그 점에 대하여 분명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코란은 상당한 기간이 지난 후였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오래 전에(beforehand; min qabl) 알라(Allah)로부터 언약(‘이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지 말라’) 했으나 그는 그것을 잊었더라. 그러나 그에게서 고의성은 발견하지 못했더라.”(코란20:115)
코란의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나는 가운데, 알라(Allah)의 명령을 망각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 명령을 고의적으로 어긴 것이 아니었다. 성경의 아담은 그 명령을 어긴 죄에 대해서 회개하는 데 있어서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 내외를 회개시키는데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다(창3:8-24). 그러나 코란의 아담은 성경의 아담과 달리 자발적으로 회개한 점이 강조된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선택하셨고, 그분에게 회개하니 그분은 그를 인도하셨노라.”(코란2:122) 그리하여, 코란의 아담은 알라(Allah)와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 그의 죄가 대물림되지 않는다. 코란은 성경의 원죄설을 부인하고, 맹자처럼 인간의 성선설을 주장한다.
코란의 아담은 성경의 아담과 달리, 죽음의 경고를 받은 적도 없고, 죄를 범하였지만, 자발적으로 회개하였고, 그 후손들에게 죄를 대물림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코란의 아담이 성경의 아담보다 훨씬 더 탁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과 코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정반대의 사실을 알 수가 있다.


3) 코란의 인간창조는 천지 창조보다 더 위대하지 않음
코란은 성경처럼(창1:1~2:3) 매일 매일의 창조 역사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코란은 매일 매일의 창조 역사가 완성된 후,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4; 18; 21;25)”와 같은 말씀도 없고, 여섯째 날 하나님께서 아담 내외를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와 같은 말씀도 없다. 코란은 성경 말씀과 정반대로, 천지 창조가 인간 창조보다 더 위대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로 천지창조는 인간의 창조보다 더 위한 것이되,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더라.”(코란40:57)
여기서 대다수 사람들이란 곧 천지창조 보다 인간의 창조를 더 위대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염두해 둔 말이다. 사실 성경은 아담 내외 창조는 천지창조나 다른 피조물들의 창조와는 전적으로 구별하여 소개하는 가운데, 아담 내외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다.


4) 코란의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지 않았음
코란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개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의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6,27).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은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가 있다. 그 답은 남자와 여자’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겠다.”(창1:26)고 말씀하신 후, 만드신 바가 곧 “남자와 여자”(창1:27)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사람, 곧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모양을 따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소개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어떤 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반영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는지에 대해서 성경의 창세기 2장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그렇게 창조된 아담은 혼자서 동물들의 이름을 짓도록 하셨다. 그런데, 그의 독처함이 보시기에 좋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그의 아내 곧 여자를 창조하신 다음, 그 둘을 결혼시켜 '한 몸’을 이루게 하셨다.
아담은 아담이고 그의 아내는 그의 아내였다. 분명히 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둘을 ‘한 몸’이라고 말씀하셨다. 둘이 ‘하나’란다. 여기서 '하나’라는 말은 숫자적인 면에서 '하나’가 아니다. 교제적인 면에서 ‘하나’라는 말이다. 하나 됨을 누린다는 말이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하나 됨을 누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아담 내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 먹기 전까지는 하나 됨을 누렸음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그 둘은 한 몸을 이루어 하나 됨을 누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반영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다음, 그 둘은 더 이상 하나 됨을 누리지 못하였다. 그 둘만 하나 됨을 누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 됨을 누리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더 이상 반영하지도 못하였다. 아담 내외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반영하지도 못하고, ‘하나’ 됨을 누리지 못한 바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엇이겠는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창2:17)라는 말씀에 기초하여 볼 때, 그 답은 곧 죽음이다. 아담 내외가 하나 됨을 누리지 못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 곧 죽음이다. 성경은 아담 내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난후, “정녕 죽으리라”라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대로, 그들은 “죽은 자들”이 되었다. 성경은 첫 사람 아담이 죽었고, 그 후손들이 아담 안에서 모두 다 죽은 자들이라고 선포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성경은 죽은 아담과 그 후손들을 살리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에 대해서 줄곧 기록하고 있는 책이다. 반면에 코란의 아담은 결코 죽은 적이 없다. 코란의 첫 사람 아담은 죽지 않았고 그의 후손들도 죽지 않았다. 코란의 아담과 그 후손들은 죽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를 다시 살릴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가 결코 필요하지 않다. 코란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의 필요성을 주장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5) 창조주 하나님의 복수 개념
코란에서도 창조주 하나님의 복수개념이 담긴“우리”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우리” 번역이 “We"로 되어 있는데 한글 코란에는 “하나님” 또는 “나”로 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사람들이여 우리가 너희를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였다...”(코란 49:13) 에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코란은 신약 성경에서처럼 그 ”우리“ 개념을 성부, 성자, 성령 개념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삼위일체 개념에 대하여 강력히 비난하는 내용이 많이 있다(4:171; 5:76; 3:55 등).
성경의 하나님께서 사람, 곧 남자와 여자를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만드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복수 개념이 엿보인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장은 그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포함되어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이 땅에 보내어, 아담의 후손들의 죄악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실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중,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다.”(요17:22)라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각각 구별된 분이시지만 ‘하나’ 됨을 누리시는 분이시다. 창세 전, 곧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말이다.
‘ㅎ.ㄴ울님’이나 ‘하느님’이라는 말은 있었지만, ‘하나님’이라는 말은 우리 말 가운데 없었다. 그런데 캐나다 출신 게일 선교사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 보급했다. 아마도 그는 ‘하나’라는 숫자에 존칭 접미어 ‘님’자를 붙여 ‘하나님’이라고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 두 분이 ‘하나’ 됨을 누리는 분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겠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두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됨을 완벽하게 누리신다.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가 하나 됨을 온전히 누린다. 그리스도를 함께 모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을 누려야 한다. “...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


4. 나가는 말
이슬람권의 영혼들은 코란의 아담에 대한 이해만을 갖고 있고, 성경의 아담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본질적으로 성경의 아담의 후손들이다. 그들도 아담이 육신적 죽음을 갖기 훨씬 전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고 난 다음, “죽은 자”가 되었고, 그 후손들도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 되었음을 알게 하자! 그리고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을 살려주셨음을 알게 하자! 그리고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경험하게 하자! 그리하여, 그들도 우리와 함께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고, 더 나아가서 성 삼위 하나님과 하나가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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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신학 특강


코란의 부활과 성경의 부활 I
<아담을 중심으로>


부활: 코란에서도 중요한 주제


부활은 성경의 가장 큰 주제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부활의 중요성은 코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특별히 , 코란 75장은 '부활의 장'으로서 부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부활의 날은 곧 최후 심판의 날이기도 하다. 최후의 날, 심판이 있기 직전에 모든 영혼이 이전에 죽었던 육체와 결합하여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부활의 날과 심판의 날을 각각 구별하는 코란 학자들도 더러 있지만, 부활과 심판이 같은 날, 곧 최후의 날에 거의 동시적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주장이 압도적이다. 다시 말해서, 최후의 날에 인류의 부활과 알라의 대 심판이 펼쳐지게 된다는 것이다.
최후의 날(코란4:136)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분리(결정)의 날’(코란77:13), ‘결산의 날’, ‘심판의 날’(코1:3), ‘부활의 날’(코21:47), ‘깨우는 날’(코30:56) 등이다.
최후 심판의 날, 죽은 영혼과 육체가 부활하면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천당(잔나, 파르디우스)에 가서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고, 반면에 악한 일은 행한 자는 지옥(자한남, 자힘)에 떨어져서 영원히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코란의 부활과 성경의 부활이 엇비슷한 것 같다. 그 이유는 코란의 종말론이 성경의 종말론에 크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부활과 코란의 부활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가? 그렇다면, 두 부활이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의 첫 사람 아담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코란적 이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 이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점에 대해서는 본 소식지 금년 1,2월호에서 자세히 설명했지만, 한번 더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코란의 아담: 죽음과 원죄와 무관


성경의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코란은 성경의 그 명령을 크게 두 가지 부분에서 수정했다. 1) ‘선악과’를 ‘이 나무’(this tree)로, 2) "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를 "너희가 죄인들 가운데 있게 되리라."(코란7:19하)라고 각각 수정했다. 왜 코란은 그렇게 수정했는가? 아담 내외가 이른바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즉시 죽었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코란적 성경해석의 원리를 알 수가 있는데, 문자를 통하여 상징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고,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코란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할 때, 그 나무 속에 악이 있고, 그 악 속에는 사람이 먹으면 즉시 죽게 하는 독이 있다는 식의 논리를 펼치고 있다.
또한, 코란은 아담이 그 과실을 따 먹은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다.
"오래 전에(beforehand; min qabl) 알라로부터 언약('이 나무에 접근하지 말라') 했으나 그는 그것을 잊었더라. 그러나 그에게서 고의성은 발견하지 못했더라."(코란20:115)
오래 전에 들었던 말씀이었기 때문에, 그 말씀을 까먹고, 그 과실을 따 먹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코란의 아담은 그 과실을 따 먹는데 있어서 고의성이 없었음이 참작되어 알라로부터 완전한 용서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선택하셨고, 그분에게 회개하니 그분은 그를 인도하셨노라."(코란2:122) 그리하여, 코란의 아담은 알라와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 그의 죄가 대물림되지도 않는다. 코란은 성경의 원죄설을 부인하고, 맹자처럼 인간의 성선설을 주장한다.


성경의 아담: ‘뿌리 뽑힌 나무’


그렇다면, 우리는 아담에 대하여 코란적 이해를 갖고 있는 자들에게 특별히 성경의 아담의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그 설명은 이른바 ‘뿌리 뽑힌 나무의 예’를 통해서 설명할 수가 있다. 나무의 뿌리가 뽑혔기 때문에, 그 나무는 이미 죽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무의 뿌리가 뽑혔지만, 그 뿌리에 붙어 있는 흙을 인하여 나무는 당분간 살아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대지에 심겨져 있을 때와 비교하여 보면, 그 나무는 온전하지 못하다. 대지에 심겨 있지 못함으로 충분한 양분과 물을 섭취할 수 없게 됨에 따라 나뭇잎이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하고, 생기가 없게 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완전히 죽게 된다. 뿌리가 뽑히고 난후, 그 나무에는 이른바 죽음의 증상들(The Symptoms of Death)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아담의 삶은 죽음의 증상들이 있는 삶이며, 제한된 삶(Limited Life)이다.
성경의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난 후에도, 그가 여전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른바 죽음의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가운데 '죽은 자'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 되었다.성경은 첫 사람 아담이 죽었고, 그 후손들이 아담 안에서 모두 다 죽은 자들이라고 선포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고전 15:22).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에게서 태어나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죽은 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코란의 아담은 성경의 아담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그 특별한 의미의 ‘죽음’을 모른다. 코란의 아담은 그의 육신의 수명이 다 되어 죽었을 때 마침내 '죽은 자'가 되었을 뿐이다.
성경의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 곧 바로 죽음의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 그는 죽은 자가 되어가는 중에 있었기에, 그는 다시 살아나지 않으면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성경의 아담: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가?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나는 일, 곧 부활은 죽은 자가 스스로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려 주심, 곧 부활시켜 주심으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가 어떻게 살아나기 시작했는가? 하나님은 뱀의 유혹으로 인하여 ‘죽은 자’가 되기 시작한 성경의 아담을 부르신 후, 뱀에 대한 저주를 공개적으로 선포하셨다. 그리고 그 저주는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을 선포하셨다. 성경의 아담은 그 ‘후손을 낳을 여자’가 곧 자신의 아내임을 알게 되고, 그 아내 이름을 ‘하와’라는 새로운 이름을 불렀다(창3:20). ‘하와’는 ‘모든 산 자의 어미’라는 뜻이다.
그것은 아담이 그의 아내와 더불어 이미 ‘죽은 자’였지만, ‘그 후손’으로 말미암아, 다시 ‘산 자’가 되고, 또한 그의 자녀들도 ‘산 자들’이 될 수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아담은 다름 아닌 자기의 아내가 그 뱀을 저주할 후손을 잉태할 자요, 그와 그 모든 후손들이 그 후손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성경의 아담이 그의 아내를 ‘모든 산 자의 어미’의 뜻을 지닌 하와라 부르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곧 바로 그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 사실, 성경의 아담 내외는 이른바 선악과를 따 먹고난후부터,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그 치마 대신에 가죽옷을 입게 하셨을까? 아담이 가죽 옷을 입게 된 것은 그 가죽의 주인공인 짐승의 죽음으로 이루어졌다. 짐승이 단지 아담에게 옷을 제공하기 위하여 죽게 된 것이 아니었다. 짐승의 죽음 속에 희생 제사 개념이 담겨져 있다. 희생제사 개념은 아담의 아들 아벨의 제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더욱 구체적으로 소개되었다. 궁극적으로, 그 희생 제물의 실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경의 아담이 그의 아내를 하와라는 새 이름으로 부르고, 짐승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가죽옷을 입게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아담이 가죽옷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아 입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죽었던 아담이 다시 살아났다는 증표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다시 살리는 역사, 즉 부활의 역사를 경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경의 부활: 새창조의 기초
성경 신학적으로 부활을 기초로 하여 진행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새 창조라고 한다. 반면에 엿새 동안에 걸쳐 이루어진 창조를 첫 창조라 한다. 성경의 아담은 이른바 선악과를 따 먹고 난후 곧 바로 죽은 자가 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는 일, 곧 부활을 기초로하는 새창조 역사를 경험하기 시작했고, 새창조의 주인공이 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아담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난 직후에, 이미 죽게 된 아담을 다시 살리시는 일, 부활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지는 새 창조라고 한다.
새창조는 엿세동안에 완성된 첫 창조와 달리 첫 사람 아담으로 씨가 뿌려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꽃을 피우고, 그의 재림으로 온전한 열매를 맺게 되어 완성된다고 볼 수가 있겠다. 성경의 아담은 코란의 아담과 달리,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 죽은 자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다시 살려주시는 역사를 통하여 이른바 새 창조의 주인공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란적 아담 개념에 익숙한 자들은 다음과 같이 반문할 수가 있을 것이다.
"아담이 부활의 역사를 경험하기 시작하였다면, 그는 결코 죽지 않고 이 땅에서 지금까지도 살아 있어야 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질문은 새 창조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한 가운데 이루어진 질문이라고 볼 수가 있겠다.
우리는 그 점에 대해서 다시 한번 ‘뿌리 뽑힌 나무’ 예를 들어 설명할 수가 있겠다. 그 ‘뿌리 뽑힌 나무’가 궁극적으로 다시 생기를 얻고 살기 위해서는 새로운 땅에 온전히 심겨져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으로 상징된 그 나무가 본래 심겨졌던 땅은 첫 창조의 에덴동산이라고 보고, 새로 심겨지게 될 땅을 새 창조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볼 수가 있겠다. 성경의 아담이 이 땅을 완전히 떠난 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죽음의 증상들은 완전히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온전히 드러내는 신적 삶을 소유한 자로서 말이다.


코란의 부활
코란의 부활은 성경의 부활과 언뜻 보면 비슷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완전히 다르다. 코란의 아담은 그가 935세가 될 때까지 결코 죽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의 부활의 역사, 곧 새 창조 역사를 결코 경험하지 못했다. 코란의 아담은 이른바 최후의 심판 날에 알라의 심판을 받기 위하여 마침내 부활할 뿐이다. 코란은 성경처럼 종말을 하나님의 새창조의 완성으로 증거하지 못하고, 고작 최후의 심판 날과 인류의 부활 날 정도로밖에 증거하지 못한다.


결론:
코란의 부활이 성경의 부활과 다르다. 두 부활이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코란의 죽음과 성경의 죽음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다르기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 아담을 중심으로, 특별히 이른바 아담의 선악과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이른바 선악과 사건으로 인한 아담의 죽음에 대하여 코란적 이해를 갖고 있는 자들을 위해서 이른바 뿌리 뽑힌 나무의 예를 들어 설명하여 보았다. 그리고 아담이 이 세상을 떠나 새 창조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됨에 대하여 뿌리 뽑힌 나무의 예를 한 번 더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아담으로 상징되는 그 나무의 뿌리가 새 창조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다시 심기워져 영원히 살게 되었다고 이해하였다. 그리고 부활이야말로 하나님의 새 창조의 기초라는 사실을 이해하였다.
지금까지 코란의 부활과 성경의 부활의 차이점에 대해서 아담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다음에는 같은 주제를 아브라함을 통하여 강의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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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최대 축제와 아브라함의 제사
I. 이슬람의 최대 축제
미국의 이라크 침공위협으로 그 어느 때보다 중동지역에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금년에도 전 세계 무슬림들의 연례 메카 성지순례(하지)가 있었다. 사우디 당국은 자국인 50만명을 포함해 170여개국에서 약 200만명의 무슬림들이 참가했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한번 예배하면, 다른 곳에서 10만 번 예배한 것과 같고, 메카에서 하루 단식하면, 다른 곳에서 10만 일(日) 단식한 것과 같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때 방문하는 것보다도 하지(Hajj: 성지순례) 기간에 방문하는 것이 가장 의미가 있다고 했다. 하지(Hajj) 공식기간은 이슬람력 12월 8~10일이다(금년 양력 2월 11~13일).
하지는 이슬람의 다섯 가지 기둥 중의 하나이다. 하지 기간 중, 마지막 10일에 어린 양 등 이슬람에서 허용하고 있는 짐승을 알라의 이름으로 희생시켜 알라의 제단에 바친다. 이것이 곧 이슬람의 최대 축제인 “희생축제”(Eid al Adha)이다. 영어로 “The Feast of Immolation(Sacrifice)”라고 한다. 이슬람권 사람들은 축제를 전후하여 일주일 정도의 긴 휴가를 즐긴다. 그리고 새해 인사를 주고받는다. 근래에는 새해 인사를 신정 때도 하지만, 이슬람력에 따라 갖는 대 축제(명절) 때 나누는 새해 인사가 가장 의미가 있다.
이슬람의 최대 축제인 희생축제는 코란의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친 사건을 기념한 것이다. 그 축제의 뿌리가 아브라함의 아들 제사라고 한다면, 성경의 아브라함 제사를 비교하는 가운데, 이슬람권에서의 기독선교의 가능성을 발견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II. 성경의 아브라함 제사와 코란의 아브라함 제사


1. 같은 점
1) 하나님/알라의 시험사건이었다.
성경: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창22:1a).
코란: “실로 이것은 분명한 (알라의) 시험이었다"(코란37:106).


2) 하나님/알라의 명에 따른 것이다.
성경: 창22:1b
코란: “그리고 난 다음 그 아들(이스마엘)이 성장하여 그와 함께 일할 수 있을 만큼 되었을 때, 그가 말하기를, ‘오 나의 아들아, 내가 너를 제물로 바치는 한 꿈을 꾸었다’”(코란37:102a).


3) 아브라함이 순종하였다.
성경: 창세기 22:15-18
코란: 코란37:103.


4) 아들을 대신하는 제물이 준비되었다.
성경: 창세기 22:11-14
코란: “그래서 우리(알라)는 그를 위대한 희생제물로 속량했다”(코란 37:107).


5) 순종하여 하나님/알라로부터 복을 받았다.
성경: 창세기 22:15-18/ 코란: 코란37:108-111


2. 다른 점
1) 제물로 드려진 아들
성경: 이삭(창22:2). 코란: 이스마엘(코란 37:102)


2) 아들과 상의 여부
성경: 이삭과 상의 없이 아버지 혼자서 일방적으로 진행한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삭도 아버지의 마음을 다 읽고 기꺼이 순종하였음에 틀림이 없다. 그가 제물 될 때 필요한 나무를 그의 몸에 다 지고 산에 올랐던 점과, 두 사환들과 동년배로 장성한 상태였던 점을 고려하여 볼 때 우리의 추측은 지극히 타당하다,


코란: 이스마엘에게 묻고, 그의 적극적인 동의를 얻어 진행한다. 이스마엘을 성경의 이삭과 차별화시키고 있다. “그(아브라함)가 말하기를, '너(이스마엘)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아들이 답하기를, ‘오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명령받으신 대로 행하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아버지께서 제가 인내하는 자들 가운데 속하게 됨을 발견할 것입니다.’”(코란37:102b)


3) 제물의 정체가 무엇인가?
성경: 그 뿔이 수풀에 달린 수양이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창22:13)


코란: “훌륭한 희생 제물”이다. 그 제물을 이슬람 학자들은 천국에 있는 양 한 마리라고 해석하였다. 이브누 압바쓰는 “그 어린양은 천국에서 40차례의 가을을 거쳐 길러진 살찐 것이었다고 주장했다(성 꾸란 p.845) 그리하여 그 천국에 있던 어린 양 한 마리가 어떻게 이 땅에 있던 아브라함의 손에까지 전달되었는지에 대한 다음과 같은 민속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 있다.” 한 천사가 이스마엘을 대신하는 훌륭한 희생 제물에 대한 알라의 선포를 듣자마자, 제단에 올려진 이스마엘을 구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천국의 양 한 마리를 빠른 속도로 급히 가지고 날라 왔다. 그런데, 날라 온 속도가 심히 빨라 그 양의 털이 다 빠지고 말았다. 그 빠진 양의 털이 하늘에 휘날려 푸른 하늘 은하수가 되었다(최영길의 이슬람 문화, 172참조).


4) 대체 제물의 예표성
성경: 예수 그리스도가 예표되어 있다. 사실, 성경 66권은 그 ‘수양’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로 구체화됨을 보여 주는 가운데, 그 제물 속에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예표되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과 언약의 제사의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다. 그를 믿는 자들이 그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언약혜택을 받게 된다.
언약혜택이란 하나님께서 그와 언약을 체결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친히 노릇해주신다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 노릇해주신다는 개념을 아버지와 자녀 그림으로, 왕과 그의 백성 그림으로, 목자와 양의 그림 언어로 설명한다. 대표적인 그림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되어, 아버지 집에 상속자가 되는 그림이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는 양이 푸른 초장에서 풍성함을 누리는 그림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나라의 백성(또는 왕자들과 공주들)이 되는 그림이다.


코란: “그래서 우리(알라)는 그(아브라함)를 위대한 희생제물로 속량했다”(코란 37:107) 이 구절을 통해서 볼 때, 아브라함은 알라가 예비하여 준 그 위대한 희생제물을 받쳐속량받은 것 같다. 오늘날도 무슬림들이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본을 따라, 정성을 다하여 양을 제물로 바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제사를 통해 속량받았다는 확신을 갖은 자가 단 한 명도 없다.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아브라함이 이삭 대신에 희생제물로 드린 양 속에는 내포되어 있었지만 코란의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 대신에 드린 이른바 위대한 희생 제물 속에는 내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란의 아브라함의 본을 따라, 무슬림들에 의해서 희생 제물로 드려지고 있는 양은 한 마리의 양일 뿐이다.


5) 오늘 날의 기념
성경: 제사 사건 자체를 기념하라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경의 핵심이 제물이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당하신 예수라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음을 깨닫고,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이른바 성찬을 통하여 그의 죽으심을 기념한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3-26)


코란: 제사 자체를 기념하라는 내용은 없다. "우리(알라)는 그(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내려 후에 올 세대들의 기억 속에 남게 했노라“(코란37:108). 자칭 이스마엘의 후손 무함마드가 이스마엘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본 받도록 하기 위하여,희생제를 드려 본을 보였다.
그런데, 희생제 뿐만 아니라, 하지(Hajj) 기간에 진행되는 다른 의식들도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탄을 향하여 7개의 돌을 던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신의 제단에 바치려 할 때, 사탄이 3번이나 나타나 방해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못된 아버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스마엘에게는 아버지께 순종하지 말라고 유혹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화가 난 아버지와 아들이 사탄에게 돌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금년에도 사탄은 1천 400만개 가량의 돌 세례를 받은 셈이다.


6) 시험의 의도
성경: 아브라함의 부활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삭을 드렸으니...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11:17) 사도 바울이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사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3-4)라고 선포할 때, 그 ‘성경대로’는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까지의 3일 길이라는 해석이 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해석이다. 아브라함 편에서 볼 때, 3일 동안 이삭은 죽은 자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유컨데,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8) 다음 이야기는 다음 호에서 계속 다루겠다.


코란: 믿음의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언급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부활의 믿음이라는 내용이 전혀 없다. 무슬림들은 아브라함의 아들 제사를 통하여, 이른바 은하수의 비밀을 깨달았는지는 모른지만,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은 깨닫지 못했다. 그들도 예수님의 대속과 언약의 제사를 온전히 깨닫고 진정한 축제라 할 수 있는 주님의 성찬 예식에 참여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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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권 전도 수월한 면도 있다!
("전도폭발" 첫째 질문과 "이슬람 신앙" 5번째 항목을 중심으로)
미국의 제임스 케너디 목사가 개발한 "전도폭"(Evangelism Explosion)이 있다. 현재 "전도폭발"은 유엔(UN) 가입국보다 훨씬 더 많은 211개 국가에 보급되어 있다.
필자는 이슬람권에서 "전도폭발"을 통하여 주님께로 돌아온 영혼들이 결코 적지 않음을 목격하였다. "전도폭발"에서 전도자가 피전도자에게 던지는 첫 번째 질문: "당신은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오늘이라도 이 세상을 떠나면,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하는 단계에 도달하셨습니까?"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그 질문을 진지하게 주고받기만 한다면, 그 결과는 매우 낙관적이다.
그런데, 그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상대방의 안녕과 행복을 묻는 내용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논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없지 않는가! 그것도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 당장 맞이하게 될 죽음이지 않는가! 실례를 무릅쓰지 않으면 던질 수 없는 질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질문을 하기 앞서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어느 정도 뜸을 드릴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슬람권에는 그 질문을, 실례를 무릅쓰지 않고서도, 굳이 뜸을 드릴 필요도 없이 던질 수가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랍권/이슬람권에서는 그 질문을 할 때, 굳이 피전도자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피전도자의 죽음이라는 잇슈를 꺼내어 그를 당혹스럽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 질문을 완벽하게 해낼 수가 있다. 무슨 말인가?
"당신은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오늘이라도 이 세상을 떠나면..."이라는 내용을 완전히 다른 말로 바꾸고 있다. 어떤 말로 바꾸고 있다는 말인가? "오늘이 바로 알라(Allah)의 심판 날이라고 한다면..."으로 바꾼다.
'알라의 심판 날'은 "이슬람 신앙" 여섯 가지 항목 중에서 다섯 번째이다. <이슬람 신앙의 6항목 : 1)알라(Allah) 2)알라의 천사들 3)알라의 책들 4)알라의 선지자들/사도들 5)알라의 심판 날 6)선과 악의 숙명론>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의 첫 장인 제 1장을 펼치자마자, "(알라는) 심판의 날을 주관한다"(코란1:3)는 내용이 나온다. 코란 제 1장은 코란의 진수로 표현되기도 하며, 코란을 여는 장이라는 뜻에서 개경장이라고 한다. 무슬림이 하루 기도생활 중에 최소한 17회 이상 암송하는 장이기도 하다. 무함마드가 생존 중에 이 장을 가장 중요시했다고 한다. 예배시 이 개경장을 빠뜨리면 그 예배가 무효가 된다고 한다. 어쩧든, 무슬림은 알라의 심판 날에 대한 믿음을 매일같이 적어도 17회 이상고백하고 있다.
또한 코란은 '알라의 심판 날'을 '결산의 날', '최후의 날' '분리의 날', '에워싸는 날', '부활의 날'등으로 곳곳에서 소개하고 있다. 코란을 경전으로 삼고 날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무슬림은 '알라의 심판 날'에 대한 믿음을 매일같이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오늘이 바로 그 심판 날이라면..."라는 말로 역사의 종말을 논하는 것은 "당신은 ... 오늘이라도 이 세상을 떠나면..."이라는 말로 개인적인 종말을 논하는 것 못지 않게 실감 나가는 일이다. 무슬림은 '알라의 심판 날'에 심판대 앞에 모두 다 서게 될 것에 대해서 철저히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심판 날, 이슬람의 마지막 선지자 무함마드가 그들을 위하여 중재하여 줄 것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심판 날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알라와 무함마드가 그들의 심판 문제를 위해서 해 준 것이 아직까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권의 영혼들에게 전도폭발의 첫 번째 질문은 대단히 충격적인 질문이 아닐 수가 없다. 종교학적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려면,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슬람의 신, 곧 알라(Allah)에게는 초월성만 있지, 내재성이 없다. 코란을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알라가 그들에게 찾아 와서 뭔가를 해 준 적이 없다. 무함마드 역시 그를 따르는 자들의 구원을 위해서 해 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알라의 심판 날'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심판 날, 그 심판을 결코 받지 않는다. "내(예수 그리스도)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지내다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하늘에 올라가(산 자들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왕 노릇하심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는 권세를 부여받게 된다. 그 심판 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자의 대열에서 서서 심판자들이 된다. (계20:4-6)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산 자들이 되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되?/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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